조문기(趙文紀) 선생은 1926년 5월 19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조국의 독립과 민족 정화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일하던 중, 조선인 노동자 3,000여 명이 참여한 '조선인 멸시 규탄 파업'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지명수배를 받아 귀국한 후, 1945년 1월 유만수, 우동학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였습니다.
김 애국지사는 당시 대전 대덕군 기성면 가수원 출신이다. 공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1936년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항일 비밀결사 조직 '명랑클럽'을 조직했다. 주로 일어 사용 금지, 신사참배 거부, 악질 일본인과의 교유 배척 등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항거와 민족의식 고양에 앞장섰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한 본격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하지만 조직원 중 한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조직이 드러나 김 애국지사와 회원들도 체포됐다.
김 애국지사는 1942년 9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현/ 장태산 삼보실 장애인시설 후손)
애국지사 김인의 묘와 애국지사 곽낙원의 묘입니다. 곽낙원 선생은 김구 선생님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의 기여를 했던 독립운동가 중에 한 분이시고 임시정부의 뒷바라지를 홀로 다 하셨던 분이시라고 합니다.
김인 선생은 김구 선생님의 장남입니다.
대전 현충원에는 김구 선생님의 가족 분들이 많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장군묘역으로 가면 김구 선생님의 둘째 아들, 김신 장군의 묘도 잇습니다.
1950년 제1사단장으로 한국전쟁 다부동전투에서 25일간에 걸친 북한군 3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는 등 낙동강 전선과 대구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에 의하면, 돌격 직전 병사들에게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라고 독려하였다.
송재훈씨는 인천애서 발생한 페인트 원료창고에서 화제시 추가 피해를 막기위해 노력하다가 사망하신분..